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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6·25 동란의 격전지 '다부동'을 다녀와서.
(칼럼) 6·25 동란의 격전지 '다부동'을 다녀와서.
  • 김왕규 기자
  • 승인 2022.07.05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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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수필가 정홍술

민주평통 강남구협의회 100여 명의 자문위원들은 6·25을 맞아서 발대식을 시작으로 2022 강남평통 평화로드 대장정을 하기로 하였다.

전쟁의 참상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얼을 새기고, 역사인식과 전쟁의 비극을 교훈삼고자 위함이다.

2022. 6.25. 1차수 발대식은 용산전쟁기녇관에서 100여 명이 참석하여 거행하였고, 6,26일. 2차수는 다부동 전적지(칠곡.왜관)에서, 8.18 -19일. 3차수는 포항 장사리 전적지에서, 9.15일. 4차수는 인천 상륙작전 기념관등을 순방코스로 하기로 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낸 희망의 전선 낙동강 방어선 200km를 가다"

우리 강남 민주평통 자문위원 100 여명은 2022. 6.26. 아침 일직 07시 강남구청에서 출발하여 가장 치열 했지만 이제는 잊혀져 가는 6.25 전쟁 격전지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과 왜관지구 전적기념관을 우선 탐방하기로 했다.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 다부동 전적 기념관은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되새기게 하였다.

"한치의 땅이라도 적에게 빼앗기면 수많은 전우들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미 제 8군 워크 사령관의 결사 항전과 전투명령속에 전선사수가 내려진 절체절명의 죽음의 사투 현장이었던 다부동,

다부동 전투(1950.8.1--9.24)는 국가존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축한 최후의 저지선 (마산-왜간-낙동리-영덕 ; 240km)으로 대구로 진출하려는 적의 공격을 격퇴하고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구국의 격전지였다.

6·25 동란의 최대 격전지이며 대한민국을 구한 다부동 55일 (북한군 24천 여 명. 국군1만 여 명 죽거나 부상)은 어땠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 왜관철교. 혈맹국의 값비싼 희생. 가장 치열했던 328고지 전투. 다시는 없을 전무후무한 융단폭격. 시산 혈하의 유학산 전투. 최초의 전차전 볼링엘리 전투등, 다부동 전투는1950,7.29 미 제8군 사령관 워크중장이 낙동강 방어선 사수를 명령함으로써,

한국군 제1사단이 1950.8.1.낙동강을 도하한지 3일이 지남 4일에 다부동 북방 41km에서 시작되고 9.16일 개시된 반격작전 일환으로 다부동 북서쪽 11km 지점의 천생산을 탈환한 후 잔적을 소탕한 9.24, 끝났다.(북한군 3개사단을 격멸한 전투)

유엔군은 8.16. B29 폭격기 98대를 투입 융단폭격을 감행하여 북한군 13사단 기갑부대 전차부대와 미 제25사단 27연대의 최초 전차전이 이곳 다부동에서 벌어진 것이다.

55일동안 이곳 전투에서 아군은 약 1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적군은 4만 여 명중 3만 여 명이 폭격으로 죽었다. 정말로 처참한 장소인 격전지 다부동이다

다부동 지역은(다부원 이라고도 한다.조선시대 출장 관원을 위한 국영숙박 시설인 원 이였다)

다부동은 대구 북방 22km에 있는 곳으로 지방도로 905번의 시발점이 되는곳이다.

다부동은 대구 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그렇지만 지금은 남침이라는 용어 개념을 잘 이해 못하는 세대가 있어 걱정이 앞선다

6.25 전쟁은 1950,6.25, 일요일 고요한 새벽에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7.27.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만 3년 1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동안 쌍방은 38도 선을 각각 3회씩 넘나들면서. 남으로 낙동강. 북으로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했다.

이렇게 치른 6.25 전쟁은 4 단계를 거치며 전개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북한군의 남침(1950.6.25-9.15) 2. 유엔군의 반격 및 북진(1950.9.15.-11.25)

3.중공군의 침공과 유엔군의 재 반격(1950.11.25- 51.6.23)등

인명피해는 또 어땠을까

국군, 유엔군 약 48 만명, 공산군 측 150-200만명. 민간인 남북 400-500만명 추정. 북한주민 약 100만명이 자유를 찿아 월남하는등. 전쟁의 결과는 국토의 대부분이 초토화 되었고, 전쟁 후 72년이 된 지금도 휴전중이다.

다부동 전투가 끝난 직후. 이 전장을 증언한 조지훈 시인의 종군 시(詩) 가 있다.

그 시 "다부원에서" 의 말미는 이렇다.

"한 달 농성 끝에 나와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일직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명들이 이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인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者)도 다 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뒤돌아보면 지금도 한 맺히고 가슴 아픈 메아리만 울려 퍼진다.

다음은 포항지구전투 전적지와 인천상륙작전 전적지를 참관하기로 했다

202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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